친구 결혼식 사회본 썰
제일 친한 친구 한명이 결혼을 했다.
서울에 처음 상경해서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만난 친구인데,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이 오래되진 않았지만 생각의 방향이 비슷해서인지 혹은 20대의 가장 불타는 시기를 함께 이겨낸 끈끈함인지 마음속 고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찾게되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결혼을 한다며 나에게 결혼식 사회를 봐줄수 있겠냐고 물어본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너무 부담되고 떨려서, 듣자마자 고민을 3만번 정도 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강의나 발표는 그래도 나름 여러번 해봤지만 그런 발표는 망해도 나 혼자 망하는데, 이건 망하면 친구와 친구 부모님, 형수님과 형수님의 부모님까지 같이 망하는 1 + 6의 대형 이벤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결혼식 사회라는 자리를 나에게 요청할 때까지 친구가 얼마나 고민을 했겠는가? 결혼식장이 옵션으로 제공하는 사회자, 전문 MC사회, 아나운서 등등 인생에 한번밖에 없을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자리의 머리채를 잡고 휘저어줄 사람을 정하는 결정인데, 그 후보에 나를 생각하고 말을 꺼내어 준 것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큰 영광이었다. 당시에는 만약 내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평생 후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막상 하겠다고는 했는데, 준비를 하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야할지 감이 안왔다.
나에게 해답을 준 것은 역시 유튜브였다. 결혼식 준비를 하는 동안 유튜브로 결혼식 사회 관련 영상들을 모조리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찾아봤는지 나중에는 유튜브 메인 페이지가 온통 결혼식 관련 주제로 가득차는 알고리즘 오염을 경험할 정도였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영상들은 아래와 같았다.
- 고은천 사회자님의 영상 : 식 진행 순서와 돌발상황 대처법 등 다양한 꿀팁을 전수해 준다. 표준에 가까운 정보들이 가득 담겨 있어서 제일 먼저 달달 외웠다.
- 제이제이 결혼식 사회 썰 : 장난스러움을 한숟가락 추가해보는게 좋겠다고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된 영상
- 종지부부 브이로그 : 센스있는 멘트가 가득 담겨있어서 마지막에 엄청 많이 참고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확실히 살릴 수 있는 치트키 멘트들이 가득 담겨 있었음
주례없는 결혼식이 트렌드라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례가 없다는건 진짜 사회자가 다 해야하는것이었다. 그말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를 사회자로 쓰는 결정을 한 친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대본을 수십번 고쳐가며 친구를 열심히 조련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친구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된 많은 영상자료들을 시청한 결과, 친구가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는 경우 친구인 신랑을 괴롭하는건 분위기를 띄우고 유쾌한 결혼식으로 가기 딱 좋은 치트키 같은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너무 과하거나 약하거나 어색하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시궁창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현장 상황에 따라 칠 수 있는 드립을 강도별로 준비해야 했다.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연습을 했지만서도 막상 저 자리에 서보니 다리가 자진모리장단으로 떨렸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식장에 사람이 한두명씩 들어설 떄 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식이 시작되자 사회자인 나한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기 시작했는데, 너무 빛이 밝아서 실명한 줄 알았다. 정말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탓에 너무 당황스러운 와중에 준비한 드립들을 치며 식을 시작했는데, 하객들 반응을 볼 수 가 없어서(눈이 부셔서)아 조졌네 이거... 생각이 드는 찰나 웃음소리들이 들리면서 점점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친구를 실컷 놀려먹으며 분위기 좋게 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결혼식을 잘 마무리하고 신랑 신부가 행진하는데 내가 다 울컥했다.
정신없는 상황들이 마무리되고 나중에 친구가 와서 사회 너무 잘해줬다고, 다른 사람들이 사회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봐줬다고 하는 말을 듣는데, 정말 잘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다리에 힘이 풀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몇가지 이벤트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만날때 마다 욕을 하긴 하지만,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