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자: 근삼이

무일푼으로 서울 상경

나는 어릴적 부터 줄곧 컴퓨터를 잘 다루고 탐구심이 강했다. 진학하려했던 대학교는 갑갑한 커리큘럼 속에서 정작 원하는 것은 스스로 , 공부해야 하는 곳으로 느껴졌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학점은행제를 통해 정보보호학과로 진학하며 관련 공부를 해보려 하였지만 주변에 관련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공부가 외롭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전액 국비로 정보보호 전문가 과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친구 집에 서 얹혀살며 약 7개월간의 빈대생활 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침에는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 오후에는 국비교육 학원에서 교육수강, 새벽에는 복습과 자격증 공부등을 닥치는대로 했었다. 하루에 겨우 3시간도 자지 못했지만, 하루하루 늘어가는 지식과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이 생겨서 너무나도 행복했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산업기능요원 편입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학원 생활이 끝나갈 즈음 거대학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었는데, 바로 군대 영장이었다.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된다니 너무 억울할 기분이었다. 전부터 생각해 왔던 산업기능요원 제도를 알아보았지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자인데다 신체등급도 현역이고, 대학교에 진학했던 이력도 있어서 편입 우선순위에서 '최저순위'에 속하는 상태였다. 각종 커뮤니티, 병무청 문의해 보아도 '포기해라', '다리를 부숴라', '사실상 불가능 하다' 등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들만 가득했다. 그대로 포기하기에 너무 아쉬웠기에, 업체들에 실례가 될 것을 무릅쓰고 병역일터 사이트를 크롤링하여 서울 경기 지역의 모든 업종 병역 · IT 특례 지정업체에 이력서를 팩스로 발송했다. 그리고는 병역법의 산업기능요원 관련 법령을 샅샅이 뒤지고, 수십곳의 업체와의 연락끝에 내가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할 수 있을 곳을 찾게되어 결국 편입에 성공하게 되었다.

모두의 보안 커뮤니티

일을 시작하면서 부족한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될 것을 염려하며, 주말마다 오프라인 스터디를 해보기로 하였다. 고향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초보를 위한 활발한 커뮤니티를 찾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었던 나는 문득,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관련 지식을 공유하고 물어볼 수 있는 온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렵게 뽑은 멤버들은 강의만 듣고 도망가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도중에 연락을 차단하고 도망을 가거나 과제나 약속한 활동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 모임에 참석하여 밤새 연구한 주제들만 쏙 빼어먹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의 회의감은 들었지만 포기는 싫었기에 활동을 이어갔다. 결국 약 년간 매주 1 주말마다 오프라인 스터디 활동 강의 초청특강 등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1년 동안 생긴 변화는 꽤 훌륭했다. 커뮤니티 자체가 유명해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 기수마다 지원하는 지원자들도 꽤 많아졌었고, 어느새 기수가 3기째 올라가면서 주변에 나를 도와 아무런 보상도 없이 활동을 계속해주는 운영진도 생겼다. 커뮤니티의 흥패와 상관없이 서울에서의 나의 생활에 그 어느 활동보다도 나에게 열정을 심어주었고, 무엇보다 그 활동을 통해 얻게된 사람들은 홀로 외로울 수도 있었을 나의 서울 생활을 함께 지켜준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첫 이직

내가 일을 시작한 첫 회사인 컬처메이커스는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회사였다.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첫번째이고, 다양한 환경에서 강의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 크고 작은 행사들을 운영하는 책임을 맡으면서 관리자 혹은 운영자로써 가져야 하는 자세등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기술자로써 발전해고 싶었던 나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회사였지 않았나 싶다. 커뮤니티를 통해 갈고 쌓은 지식들을 활용하여 내가 갈 수 있는 자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역시 굉장히 다양한 회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 가고 싶었던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기 전에 한 SI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총 두번의 면접을 통해 진행되었다. 각각 CTO와 대표가 직접 면접에 참여했었는데, 나의 다양한 경험을 높게 평가해 주는 점과 생각지도 않았던 DevOps 포지션에 대한 제안이 나의 마음을 현혹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면접 연습을 하러 갔던 케이비시스라는 SI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특진

회사에 입사한지 약 1년 6개월, 역시 기술자로써 일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일하는 느낌은 언제나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참여하는 프로젝트들에서 활약하며 나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는 경험은, 마약을 해본적은 없지만 아마 그에 상응하는 쾌감이었지 않나 싶다. 나는 더욱 인정받기 위해 관련 기술들을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생소했던 다양한 오픈소스 솔루션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능숙하게 트러블 슈팅을 하며 솔루션 자체에 문제를 발견하여 컨트리뷰팅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은행에서 프라이빗 클라우드 기반의 AI 분석 플랫폼 구축이라는 굉장히 큰 사업을 발주하였고, 우리 회사는 그 사업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우리 회사가 참여하기로 했던 부분은 사업전체에서 쿠버네티스 서비스 배포를 자동화 하는 SRE 환경 구축이었는데, 중간에 문제가 발생하여 AI 분석 환경쪽을 담당하기로 한 회사가 사업에서 빠져버리게 되었다. 갑자기 발생해버린 돌발상황에 사업 전체가 출렁이는 분위기였으나 결국 우리 회사가 전체 서비스 개발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맡게된 사업에 제대로 그려진 아키텍쳐가 있었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와 우리팀 본부장님이 함께 사업에 긴급 투입되게 되었고, 약 6개월간 주말과 밤을 꼬박 새운 끝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짧게 표현했지만, 정말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노력과 고민을 끊임없이 했던 기간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그 공을 인정받아서, 사실상 회사에 기술자로써는 신입으로 입사했던 나는 1년 반만에 선임연구원이라는 공식 직함을 달게 되었다. 나보다 먼저 입사했던 선배님들보다 먼저 승진 발령이 났을때에는 정말 다양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결국 아직 병아리

2021년 2월경, 한국의 개발자 업계에 '토스 쏘아올린 작은공'이라는 타이틀로 연봉대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직 산업기능 요원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또 한번의 이직은 아직은 나에게 이른 감이 있었지만 현재 내가 어느정도 먹히는 상태인지 점검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여러군데 이력서를 돌려보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몇몇 회사에서는 꽤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회사에서 서류에서 탈락당한 탓이었다. 곰곰히 한번 내 이력서를 돌아보니, 기업 관점에서는 조금 갸우뚱한 부분이 이었을 듯 싶었다. 불과 2년전까지는 보안공부를 하며 관련 직종에서 근무를 했다가, 최근에는 자칭 DevOps 엔지니어라며 이것 저것 프로젝트를 들이대며 나 잘해!!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일을 했던것은 사실이지만, 경력 대비 인정을 받았을 뿐이지 사실 아직은 개발능력도 미흡하고 한 분야에서 전문가고 불리기에는 아직 미숙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좀더 내공을 다듬고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함께, 개발능력도 함양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오픈소스와 관련한 활동과 함께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며 나를 알리는 것을 동기로 하여 좀더 심도있는 기술에 관한 연구와 발표를 해보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개발해 봄으로써 개발능력도 조금씩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다. 나의 목표는 기술자로써 나의 필명 GeunSam2(근삼이)에 브랜드가 담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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